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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는 저에게 오세요. 잘 해드릴게요.˝그녀의 입김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이발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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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의 이야기다. 솔직히 ‘3개월 전이다...’ 라고 첫 문장을 쓸 정도로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한 여자를 만난 것뿐이었다.

“나 먼저 간다.”

우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꽤나 발랄했다. 난 그녀의 목소리에 머리를 말리다 말고 현관까지 그녀를 배웅하러 나갔다. 확실히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해 보였다.

‘무슨 날인가? 기념일 까먹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는 거 아냐?’

난 혹시라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날은 없었다. 그저, 기분이 좋은 건가? 왜? 승진 발표?

하긴 요 근래 그녀의 행동과 말투를 보자면 언제나 좋은 텐션을 유지하고 있긴 했다. 그 이유가 곧 있을 승진 발표일수도 있고 아님, 그냥 날이 좋아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기분은 아주 최상이었고 그 기분을 티 내고 싶은지, 평소 아끼던 빨강색 구두까지 꺼내 신고 있었다.

“먼저 끝나면 내가 그리로 갈게...”

내가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고는 현관을 열었다. 난 그녀의 키스에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가정을 갖는 것이, 이런 소소한 행복을 위함이구나 하고 느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찰랑이는 긴 생머리와 살랑이는 엉덩이까지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듯, 흥에 겨운 모습이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우희는 비타민 같은 여자였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언제나 자신의 기분보다는 내 기분을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아는 여자인 것이다. 난 그런 우희가 좋았다.

우희와 난 4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부부다. 신혼부부라면 그렇고 아니라면 또 아닐 수 있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하지만 우린... 적어도 난 아직 신혼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4년. 그녀와 만난 지 딱 4년이다. 그녀와 난 선을 통해 만났는데,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에 성공했다. 이에 친구들은 쌍팔년도 같은 결혼이라며 비웃기도 했지만 그 두 달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나에겐 너무나 길었다.

결혼 후, 처음 일 년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기였다. 난 알아갈수록 우희가 좋았고 내 이기심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우희는 날 믿고 따랐고 언제나 내 위주로 맞춰갔다. 마치, 태양을 도는 지구 같았다. 지구 안에 많은 생명체가 제각각 자신의 삶을 살고 있어도 결국, 태양을 벗어 날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그녀 나름의 삶을 살면서도 가장 큰 테두리는 나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2년... 3년... 4년이 지나 지금까지 오게 된 거다.

물론, 난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나에게 축복이고 항상 감사한 선물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말초를 때리는 자극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저, 삶에서 느끼는 소소하고 편안한 행복만이 몸에 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 삶에 바로 오늘 새로운 자극이 다가왔다. 그건 어떤 의도한 봐도 없이 불쑥 찾아온 우연이었다.

우리 부부는 담당 미용사는 달랐지만 같은 미용실을 1년간 이용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전 우희 담당 미용사가 미용실을 그만두었고 자연히 우희 또한 미용실을 옮기게 되었다.

우희는 새로운 미용실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담당 미용사가 귀엽다, 잘 한다... 등 많은 칭찬을 했고 심지어 나에게도 미용실을 옮기면 어떠냐며 권유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난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다시, 설명하는 일에 지쳐 있었다. 옆머리는... 어쩌고저쩌고... 그까짓 헤어스타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난 남자들이 미용에 관심을 두는 건, ‘꽤나 부끄럽다’라는 인식이 있던 시대에서 이십대를 보낸 것이다. 그렇기에 헤어라든지, 피부라든지... 그런 것들에 무관심한 척하면 살고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꽤나 관심도 많았고 ‘멋있어 진다’ 혹은 ‘예뻐지고 싶은 욕망’도 컸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닌 척하며 살고 있었다. 혹시라도 나의 이십대가 지금의 날 보며 비웃을까 겁이 나는 것이다.

내 이중적인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곳이 지금의 미용실이었다. 아무 말 안 해도 원하는 스타일대로 연출해주는 것이다. 굳이, 내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멋은 멋대로 살릴 수 있었다.

*

일요일 오전부터 미용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성함이?”

“김민섭입니다.”

“아.. 노보영 선생님 예약 맞죠?”

“네....”

“잠시 기다리세요.”

내 담당 미용사의 이름은 노보영이다. 노보영? 어찌 보면 촌스러운 이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섹시한 이름 같기도 한데, 사람이 참 신기한 게, 그녀의 모습 또한 이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여자의 나이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라고 교육받은 나였기에 그녀의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외모로 추측할 뿐이었는데, 실제로는 내가 추측한 나이보다 많을 수도, 아님, 훨씬 더 적을 수도 있다. 그 만큼 요즘 사람들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좀 전에 말한 대로 그녀의 외모는 이름과 비슷했다. 아리송하다 해야 할까? 예쁜 얼굴도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매력이 있기도 없기도 했다.

그녀도 자신의 그런 점을 알고 있는지, 스타일 하나는 굉장히 좋았다. 귀 밑으로 5cm정도 내려오는 단발머리에 시크하고 심플한 블랙 옷을 즐겨 입었다. 하지만 액세사리는 굉장히 화려했다.

오늘도 그녀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버핏 검정 더블 블래스트에 이너로는 몸에 딱 달라붙고 팔을 올릴 때면 작은 배가 살짝 보이는 하얀 티셔츠, 거기에 롱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롱 치마는 굉장히 특이했다. 트임의 목적은 보통 활동성에 있다. 그렇기에 타이트하게 떨어지는 치마에 트임이 있고는 했는데, 지금 그녀가 입은 치마는 A라인으로 떨어지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느낌의 치마였다. 그럼에도 그 치마에는 트임이 있었다. 그것도 옆트임이 아닌 앞트임이었다.

길게 찢어진 앞트임.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선택폭이 많다는 것이다. 미용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기나 사진을 보며 인터넷상에서 고를 수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고를 수 있다. 그렇기에 실력도 중요했지만 어느 정도의 의도가 담긴 서비스의식(?)도 경쟁사회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노보영 그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몸이 조금 움직이기라도 할 때면 깊게 찢어진 트임 안으로 그녀의 허벅지 안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는 했다.

그녀의 살결은 굉장히 곱고 지방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살가죽이 굉장히 얇아 보였다. 그 허벅지를 보고 있자니, 내가 추측한 나이보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훨씬 더 어린 축에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컷트 할게요.”

노보영이 말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말했다.

말이 필요 없다. 컷트하겠다 – 하셔라. 이게 끝이다.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내게는 그보다 편한 게 없는 것이다.

“싹둑싹둑.”

눈을 감고 가위질 소리를 듣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좋은 것뿐만 아니라 선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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