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페이지 정보
본문
따가운 햇살에 얼굴이 아려왔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욕이 절로 나왔다. 목에 건 수건으로 땀을 닦고, 수레에 벽돌을 담는다. 작업반장이 옆에서 더 담으라고 성질을 냈다. 우라질 성격 같아서는 확 받아버리고 싶었지만 깽 값을 주기 싫어 참았다.
“어이 최씨. 빨랑빨랑 움직이더라고!”
“아 예!”
그렇게 바쁘시면 같이 나르시던가. 명령짓거리만 하면서 말은 많다. 속으로는 욕이라는 욕은 다 박았지만 겉으로 표출은 하지 못했다. 수레에 벽돌을 몇 개 더 담고, 건설현장으로 끌고 갔다. 기다리고 있던 작업자들이 벽돌을 쌓고 빈틈을 시멘트로 채웠다.
“점심들 먹고 해!”
허리가 아파올 때 쯤 작업반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도 터덜터덜 걸어갔다. 점심 메뉴는 된장국에 제육이었다. 밥을 양껏 푸고 반찬을 가지러 갔다. 시부랄 욕이 입 안에서 맴돈다. 된장국은 군대에서나 먹는 똥 국이었고, 제육은 제대로 된 고기 덩어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최씨.. 안 먹을 거여?”
반찬을 푸지 않고 멍하니 서 있자 뒤에서 재촉을 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밥을 안 먹을 수 없어서 반찬을 펐다. 먼지 바닥에 주저앉아 수저를 드니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어머님 말씀대로 열심히 기술이나 배울 걸 괜히 사업을 한다고 해서는 병신 같은 놈. 눈물이 찔끔 세어 나왔다.
“빨리들 먹고 일하드라고!”
거지같은 반장 놈은 벌써 밥을 비웠는지 현장으로 걸어갔다. 늦게 가면 지랄할 것이 뻔해 똥 국에 밥을 말아 퍼먹었다. 오후에도 벽돌을 날랐다. 중간에 수레를 넘어뜨려 벽돌 몇 개를 깨먹었다. 반장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월급에서 까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쭈그러들어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해가 질 무렵 작업이 끝났다. 작업반장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내일은 우천으로 인해 사흘 간 작업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달 월급이 얼마나 될까. 벌써 걱정이 앞섰다. 꿀꿀한 마음에 친구인 갑수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러 왔다.
“15,000원 이우”
“됐어. 내가 낼게. 오만 원 권인데 괜찮죠?”
파전과 막걸리 한 주전자가 조촐하게 차려졌다. 식당 아줌마는 선불이라며 손을 벌렸다. 내가 지갑을 꺼내려 하자 갑수 놈이 지폐를 꺼내 계산을 했다. 벌이가 크지 않은 날 배려해준 것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이 컸다.
양은그릇에 막걸리를 따랐다. 짠하고 잔을 부딪치고 목을 축였다. 술이 달았다. 젓가락으로 파전을 찢어 입 안에 넣었다.
“어흐..맛있네.”
“그러게. 오랜만에 왔는데도 맛이 변하질 않았어.”
이 식당은 갑수 놈과 예전부터 많이 왔던 곳이었다. 그 때는 나도 서울권 대학에 다니는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지금에서야 사업에 실패한 40대 중년이지만 말이다. 괜한 생각을 했더니 입이 썼다. 막걸리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야야 천천히 마셔. 취할라.”
“괜찮어. 괜찮어. 사나이 최태규 이 정도로 취하진 않는다 말이야. 그나저나 요즘 일은 어때? 신약 출시한다고 바쁘다며.”
“으응... 바쁘지...그래서 말인데 태규야. 너 아르바이트 하나 하지 않을래?”
무슨 아르바이트인지 물었다. 신약임상실험이란다.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우천으로 인해 사흘간 작업이 없다는 작업반장의 말과 통장에 남은 잔고가 떠올랐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고 갑수 놈이 위험한 일을 추천했을 리 없다. 나는 갑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여 들어가.”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고.”
얼큰하게 취해 갑수와 헤어졌다. 얼굴에 취기가 돌았다. 도로변에 주저앉아 손을 들자 택시가 섰다. 뒷문을 열고 몸을 욱여넣었다. 노쇠한 택시기사는 내가 읊어준 주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업이 망하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내 곁을 떠났다. 그년은 이혼소송을 통해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을 빼앗아 갔다.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이혼사유는 더 황당했다.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란다. 몇 년에 걸친 이혼소송이 끝나고 나에게 남은 것은 이 아파트 하나였다. 낡은 건물이었지만 제법 값이 나갔다.
“후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에서 열불이 났다. 난 숨을 몰아쉬며 아파트 놀이터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술을 너무 마셨는지 머리가 아팠다. 주위를 둘러보니 놀이터에는 선객이 있었다. 미모의 여성이었다. 도톰한 입술과 허리까지 오는 고운 머리카락이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하얀 미니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은 신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임에도 몸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엉덩이가 하도 커서 당장이라도 얼굴을 박고 싶었다. 젖가슴은 한 손으로 쥐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하반신에 붙어있는 물건이 주책머리 없게 서버렸다.
미친놈.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혹여 지나가는 길에 사람을 만나면 변태로 오인 받기 딱 좋은 상태였다. 허리를 살짝 숙이고 집까지 뛰어갔다. 집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아 그녀를 떠올렸다. 정말 꼴리게 생긴 여자였다.
수그러들었던 물건이 그녀를 떠올리자 다시 빳빳하게 섰다. 곤란했다. 이 나이 먹고 손장난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냉수로 샤워를 하고 성난 물건을 애써 다독이며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떠 보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세안을 하고 양치질을 했다. 가진 옷 중에서 그나마 깔끔한 것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보니 제법 말끔한 중년이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공원에 들렸다. 역시나 비가 내리는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수가 알려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어젯밤 만난 그녀가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최태규씨 맞으시죠.”
남자 간호사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분증을 요구했다. 지갑을 열어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었다. 간호사는 나를 작은 검사실로 안내했다. 피를 뽑고 소변 검사를 했다. 잠시 병원 복도에서 대기를 하다가 의사선생을 만났다.
“알레르기나 호흡곤란 증세, 복용중인 약은 없으신가요?”
“네 딱히 그런 건 없습니다.”
의사는 꽤나 큰 바늘이 달린 주사를 내 팔뚝에 찔렀다.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서 괜찮은 거냐고 묻자 의사가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돌팔이는 아니겠지. 주사를 맞고 밖으로 나가자 남자 간호사가 대기 중이었다. 그는 나에게 약이 든 봉지와 현금이 들어있는 봉투를 주었다.
“약은 점심 드시고 매일 한 알씩 복용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이 시간에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의사항을 듣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병원냄새가 몸에 밴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간호사에게 받은 봉투를 열자 기분이 좋아졌다. 안에는 신사임당 두 분이 날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1시간 투자해서 10만원을 벌다니 기쁜 마음에 갑수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날렸다.
답장이 없었지만 워낙에 바쁜 녀석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슈퍼에 들러 오랜만에 장을 봤다. 고기도 사고 술도 몇 병 챙겼다. 그녀가 있을까 싶어 놀이터를 가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애초에 그런 미녀가 우린 동네가 살았던가.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찝찝한 마음을 감추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녀였다. 내 마음을 녹였던 그녀였다. 어젯밤보다는 화장이 연했지만 몸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서둘러 열림 버튼을 눌렀다.
“휴우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녀는 달라붙는 트레이닝 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얀 살결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과 힙 업 된 엉덩이는 내 욕망을 부추겼다. 당장이라도 물건을 꺼내 그녀의 엉덩이에 박고 싶었다. 온갖 상상을 하던 사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6층이었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 이었다.
- 다음글12시에 다시 만나요 21.10.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