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좋은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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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복구는 평소 자신이 즐겨 듣던 트로트 가요 '꽃을 든 남자' 대신, 아주 감미롭고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어놓은 채 손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젊고 아주 싱싱한 먹이감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복구는 지금처럼 이럴 때가 가장 흥분되면서도 좋았다. 이런 상황을 굳이 설명하자면, 횟집에서 팔딱 팔딱 뛰는 횟감을 고를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런 때하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흥분되고 좋았다.
복구는 그렇게 유쾌하고도 들뜬 기분으로, 오늘밤 자신의 먹이가 될 여자를 한 명, 한 명 고르는데 여념이 없었다.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까지 내려 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행선지를 외쳐대고 있었다. 와이셔츠를 풀어헤친 한 남자가 복구가 탄 택시 옆으로 걸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일산이요! 일산!"
복구는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돈을 벌려고 나왔다면 태워도 벌써 태웠을 손님이지만, 복구는 그런 돈 몇 푼 따위에는 미련도 없었다. 복구가 택시를 모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지루한 일상에서 탈피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복구가 그 동안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아오다가, 잠깐 쉬기 위해서 지금 이 일을 하는, 그러니까 소위 '자유주의자'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무척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복구는 열심히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야말로 돈은 '개뿔'도 없고, 일이라고는 26년을 살아오면서 지금 이렇게 택시를 운전하는 게 처음이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는 그의 동네인 왕십리에서 '빨대'하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백수 건달이었다.
그런 그가 택시를 운전하게 된 데에는, 이 직업이 소위 말하는 '임도 보고, 뽕도 따는'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집구석에서만 처박혀 있다가 가끔 외출한다고 가는 곳이, 기껏 해봐야 동네 포장마차나 시장 바닥이었으니, 매일 매일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는 이런 일이, 일상에 찌든 그에게 얼마나 구미가 당길 일이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간섭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마음대로 가고, 일하고 싶으면 하고, 또 하기 싫으면 사우나에 가서 낮잠을 한숨 때리거나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기도 하니, 어떻게 보면 천성이 게을러터진 그에게 이 직업은 천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공공연히 '대기업에서 연봉 1억을 준다고 해도 안 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는 했다.
복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멈춰 세웠다. 그가 쳐다보는 시선 쪽에서 흰색 치마 정장을 입은, 무척 세련되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연희동이요"
여자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혀가 반쯤 꼬이는 발음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복구는 본능적으로 여자의 위, 아래를 급히 훑어보았다.
'나이는 많이 먹어봐야 스물 여섯, 직업은 패션 쪽 일을 하는 것 같고, 몸매는 저만하면 봐 줄만 하고…'
복구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여자에 대한, 데이터가 정리되고 있었다. 복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자를 태우기로 결정했다.
솔직히, 마음에 쏙 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을 끝내고 나서 신고를 한다던가, 또는, 협박 같은 걸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따위의, 그런 뒤탈은 전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자도 그런 은밀한 것들을 즐길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혼자요?"
복구는 여자에게 최종적으로 확인 질문을 했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일행이 있으면 절대 안 되기 때문이었다.
"네"
"타세요"
"어머, 아저씨! 가요?"
여자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복구는 여자를 쳐다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뒤에 서 있던 중년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손짓을 했다.
"부장님! 간대요! 빨리 오세요!"
복구는 순간 당황했다. 여자가 분명히 '혼자'라고 했는데 웬 덩어리 하나가 차에 타려고 몸을 흐느적거리며 걸어오는 게 아닌가?
"부장님,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강 팀장도 조심해서 들어가"
여자는 상냥하게도 보조석의 차 문을 열어주며 중년 남자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어 보이면서, 여자의 톡 튀어나온 둔부를 손바닥으로 진하게 한 번 쓰다듬고는, 차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기사 양반, 갑시다!"
복구는 미간을 찌푸렸다. 삼겹살을 먹었는지 남자의 몸에서 고기 냄새가 아주 심하게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뭐해? 빨리 가자니까!"
남자가 대뜸 반말을 해대며 재촉을 했다. 남자의 입에서 소주와 마늘 냄새가 뒤섞인 아주 역겨운 냄새가, 뜨거운 입김처럼 복구의 얼굴로 확 다가왔다.
복구는 자기도 모르게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이 남자를 태우고 가기가 싫었다. '따블'이 아니라 '따따블'을 준다고 해도 정말이지 태우고 가기가 싫었다.
"저 손님, 죄송한데요. 제가 교대 시간인 걸 깜빡 했네요"
복구는 할 수없이 궁색한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남자가 가늘게 실눈을 뜨며 복구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 시간에 무슨 교대를 한다고 그래? 차고지가 어딘데?"
"마장동이거든요"
"마장동?"
남자는 순순히 내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 여자가 복구의 차 옆으로 다가오면서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저씨, 마장동이요"
복구는 순간 귀가 번쩍 트였다. 그래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남자에게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이고, 마침 잘 됐네. 타세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복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이 놈의 택시들 아예 싹 없애 버려야 돼. 이래 가지고 내년에 월드컵이나 제대로 치르겠어. 외국인들한테 개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남자는 마지못해 차에서 내리며 혼잣말처럼 이런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뒷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손님, 마장동이요?"
복구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이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해서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네, 마장동 동신 아파트요"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가늘고 맑게 들렸다. 복구는 거울을 통해서 뒷자리에 앉아있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복구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홍 정희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 다음글12시에 다시 만나요 21.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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