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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사랑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남편과 똑같은 얼굴의 남자를 만난다.

상실의 종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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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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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종착점 01

“매니저님, 참…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

“차라리, 울기라도 하세요.”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모든 것을 관통하는 말에 가예는 아무 말도 더할 수 없었다.

쇼케이스 불빛이 어슴푸레하게 그를 비추어 음영이 드러났다.

그의 눈이 뜨겁게 일렁거리고 있었고, 그녀는 순간 숨이 막혔다.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착각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의 콧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크게 떨렸다.

일순 그가 가예의 허리를 감싸고 바짝 끌어안자,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물기가 맺힌 볼을 쓰다듬다 턱선을 타고 내려와 입술에 머물렀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그의 손가락에도 느껴지겠지.

차은성을 알게 된 이후로, 아니, 애초에 한가예의 인생에서 남자란 오직 차은성 뿐이었다.

첫 포옹도, 키스도, 섹스도 모두 차은성이 가르쳐주었고, 영원히 그 남자 한 명과 나눌 애정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다른 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혼란한 감정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매니저 님.”

그가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 내리자, 그의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그의 턱 끝에 짧게 입 맞추며 천천히 가예의 등뼈를 쓰다듬었다.

“직접 벗을래요? 아니면, 내가 해줘?”

*

10년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한성 그룹의 회장 백강태의 사생아 C군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차씨가 세간에 등장했다.

이 폭로는 결국 대대적인 소송까지 이어졌다.

전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 된 친자 검사는 C군이 친자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한성은 차 씨에게 수십 억대의 합의금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한성의 사생아이자, 백 회장 인생 최대의 오점.

차남 C군이 바로 가예의 남편 차은성이었다.

*

3개월 전

분명,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가예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고요함을 깼다. 가예는 화들짝 놀라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휴대폰 화면에 그닥 내키지 않는 사람의 이름 석 자가 떠 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휴대폰을 들었다.

“…네, 어머님.”

남편의 계모이자 그녀의 시어머니, 그리고 한성 그룹의 안주인인 이선화 여사였다.

그녀는 겉치레로 안부를 짧게 묻는가 하더니,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였다.

[뭐 어떻게 되어 가는 거니? 내가 제때제때 연락하라고 말했을 텐데.]

우아하게 포장한 목소리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가예는 그녀가 전화를 건 이유를 짐짓 알고 있었으나, 애써 태연하게 굴었다.

“네….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병원에는 아직도 가지 않은 것이냐? 내가 몇 번이나 가라고 했을 텐데.]

가예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병원이요… 네, 이제 정말 가야죠. 근데 그이가 시간이…. 도저히 저희 시간이 안 맞아서요.”

[겨우 카페 몇 개 관리하는 놈이 시간이 없긴 무슨.]

또 시작이다. 가예가 대답이 없자 선화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가예, 네가 잘 타이르고 내조하면 될 문제 아니냐.]

사실 계모인 그녀가 그들에게 이렇게 재촉하는 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선화의 친아들이자, 그룹의 장남인 백정한은 불임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단다.

그래서 그들은 후사 문제를 차남인 차은성에게 떠넘겼다.

“그럼 이번 주말에 시간을 내서….”

[아니다, 내가 봤을 땐….]

가예는 자신의 말을 자른 채 제 할 말만 하는 여자가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워낙 익숙해진지라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진 뒷말은 충분히 가예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너한테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구나. 너 혼자라도 가봐라.]

“…네?”

뒤이어 선화가 갖은 불평불만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무례한 언행과 앙칼지다 못해 경박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힌 가예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뻐끔거렸다.

[너도 뭐냐,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으니 얌전한 처녀는 아니었지 않니? 그러니 급에 맞게 은성이 놈이랑 결혼했겠지만….]

“…….”

[쯧. 아무튼, 가서 주사를 맞든, 약을 먹든, 뭣 하면 시험관까지 해봐라.]

“어머니…!”

[이만 끊는다.]

통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모욕감과 수치심 같은, 가슴이 울컥한 감정들이 온 전신을 휘감았다.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잠시 상황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제일 짜증 나는 게 누군데.

안 그래도 지난 3년간 골머리를 앓았던 일이었다.

불임의 원인을 제 탓으로 간주한 시모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언사에 기막혀해야 하는 건지, 우물쭈물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 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은 여느 때와 같은 날이 아니다.

아주, 매우 지랄 맞은 날이었다.

모든 사람과 상황이 제 목을 옥죄고 숨 가쁘게 한다.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악마 같은 인간.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한 그녀가 스스로 깜짝 놀랐다. 타인보고 죽으라고 저주하다니, 진짜 악마는 시모가 아니라, 아마 본인 아닐까?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쌓였다. 잠시 심호흡한 뒤, 그녀는 곧 진정하기로 했다.

시어머니가 지랄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무시하고 넘어가자.

운동으로 땀이나 흘려야겠다는 심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때마침 뒤에서 걸어오던 남자와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절반 정도 남은 카페라떼가 엎어졌고, 흰 식탁보를 밤색으로 물들이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

되는 일 하나 없네.

가예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른 채 천천히 고개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짙은 눈썹 밑에 자리 잡은 잿빛 눈동자가 명료하게 가예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남편 차은성과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매와는 달리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백색증 환자만큼이나 파리한 혈색까지 똑같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남편과 다른 점이라면, 이 남자는 잿빛 머리칼에 오른쪽 입술 아래에 점이 있었다.

그리고 몇 살은 더 어려 보였다.

마치 대학 시절 남편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에게 동요하고 있었다.

가예는 멍청이처럼 그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가 헝클어진 머리를 쓱 쓸어넘기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문득 정신 차린 가예가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낀 채, 할 말 없냐는 뜻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되돌아온 건 미소뿐이었다.

웃음으로 넘기려는 거라면 반쯤 성공했다. 그러나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저기요, 할 말 없어요?”

가예는 엎질러진 커피에 턱짓하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다시 눈을 맞추며 볼우물이 파일 정도로 깊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다고.

“아.”

또 ‘아’다. 그놈의 ‘아.’ 저 남자는 그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 건가?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멍청하게 서 있었네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그가 흐음, 하고 짧게 고민하더니 덧붙였다.

“그쪽, 전화번호 알고 싶어요.”

“네?”

가예가 순간 귀를 의심하며 아연한 얼굴로 있자, 그가 피식 웃더니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남자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를 애무하듯 파고들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거, 작업 거는 거예요.”

*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새로 온 알바생이었다.

이름은 이로운이고, 미대생이라고 했다.

그날은 카페 면접 보고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외모 때문에 단번에 합격했지만.

물론 가예는 작업 당한 일은 적당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꽤 집요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예는 유부녀였고, 남편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매니저한테 작업 건 맹랑한 알바생. 심지어 그녀보다 7살이나 어렸다.

그녀도 그렇게 그 일은 웃지 못할 헤프닝으로 끝날 거라 믿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설마 진심이었겠는가, 어린 애의 한낱 반항이었겠지.

일하다 간간이 그와 눈이 마주치거나,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저를 대할 때 태도가 크게 달라지곤 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감정이라 치부하고 그를 생각했던 것이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어느 날, 문득 로운이 커피에 휘핑크림을 올리며 말했다.

그와 등을 진 채 설거지를 하던 가예는 네, 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가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온종일 그녀의 정신은 온통 딴 곳에 가 있어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1개월 전

립스틱을 바르던 가예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보았다.

은성이 문 앞에 삐딱하게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그는 검은색 세미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는데, 시선이 짧게 스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절로 손발이 저렸다.

“응?”

“네가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만나 뵙는 거잖아.”

그러자 그가 성큼 긴 다리를 뻗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은성이 가볍게 미소짓자 가예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가예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가예는 은성의 저의를 알아차리고 고개 들었다.

어느새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 그의 달콤한 향기가 훅하고 신경을 자극했다.

차마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전신을 타고 흐른 긴장감에 가예는 그만 손을 헛디뎌 귀걸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가예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은성이 먼저 귀걸이를 주웠다.

“아… 고마워.”

“그렇게 공들여서 준비하지 않아도 돼.”

은성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의 턱 끝을 치켜올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예는 침을 삼켰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쓸기 시작하더니, 귓불을 부드럽게 어루어만졌다.

손끝이 피부에 닿는 느낌에 가예는 흠칫 몸을 떨었다.

“으, 은성….”

“쉿, 가만히 있어.”

달래듯 부드럽게 명령하는 목소리에 가예는 입을 다물었다.

곧 그가 천천히 그녀의 귀에 귀걸이를 끼워주었다.

“어차피 그 작자들은 네가 뭘 입든 관심도 안 줄 거야. 자신들 체면 차리기만 바쁜 인간들이니까.”

은성이 ‘작자’를 발음하며 낮게 조소를 흘렸다.

가예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는 자주 그들 ‘따위’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으며, 가진 건 돈뿐이니 필요할 때만 그들은 이용하면 된다는 식의 말을 하곤 했다.

“…너도 같이 가는 거잖아.”

“응?”

가예는 목까지 붉게 달아오른 것을 숨기려 괜히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덮었다.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너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한 거야.”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머리 위로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참 얄궂다니까.’

그는 늘 그랬다. 언제나 어떻게 하면 가예의 마음을 흐물흐물 녹일 수 있는지 꿰뚫고 있는 것 마냥 굴었다.

‘물론 헛소리를 해도 좋아하겠지만….’

가예는 고개를 들고 잿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은성아, 난 감사하고 있어. 회장님 덕분에…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으니까.”

침묵 끝에 마침내 나온 말은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가예가 은성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도, 늘 생경한 기분이 들어 절로 몸서리쳤다.

“응, 예쁘다.”

은성이 눈을 낮게 내리깔며 말했다.

가예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다시 거울로 홱 몸을 돌렸다.

어째서인지 은성이 등 뒤에서 웃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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